114514와 ‘전자 이부프로펜’, 같은 일본발인데 퍼지는 방식은 정반대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온 게 둘 있다.
하나는 작고 동글동글하고 귀엽다.
다른 하나는 114514다.
한 문장에 같이 놓으니 사고 같지만, 중국과 한국의 인터넷 문화를 보면 이 둘은 꽤 재밌는 비교 대상이다.
먼저 짚고 갈 게 있다. 치이카와는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대중적인 캐릭터 브랜드다. 반면 야수선배는 중국에서는 큰 밈이지만, 한국에서는 치이카와만큼 대중적이지 않고 니코니코 동영상이나 인무(淫夢) 계열 같은 마니아 커뮤니티에 머물러 있다.
그러니까 “둘 다 똑같이 대박”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도 일본 인터넷 문화가 어떻게 국경을 넘는지 보기에는 이만한 사례가 없다.
1. Bilibili는 ‘중국판 니코니코’가 아니다. 그래도 뿌리는 꽤 가깝다
일본 사람이 Bilibili를 처음 보고 “어, 니코니코 같은데?” 하는 건 기분 탓이 아니다.
중국의 탄막 영상 문화는 AcFun과 초기 Bilibili 시절 일본 니코니코 동영상의 영상과 표현이 들어오면서 자리를 잡았다. Bilibili에 올라온 중국 MAD 역사 글에도 2009년에 니코니코에서 넘어온 MAD 영상이 초기 Bilibili 귀축 문화의 출발점 중 하나로 소개된다.[1]
그 뒤 중국에서는 사람의 목소리와 영상을 잘게 쪼개 반복하고, 음악에 맞춰 편집하고, 원래 의미를 부숴서 웃는 ‘귀축(鬼畜)’ 문화가 따로 발전했다. 2015년에는 Bilibili에 ‘귀축 구역’이 정식으로 생겼다고 한다.[2]
그래서 지금의 Bilibili를 ‘중국판 니코니코’로만 설명하면 너무 대충이다.
지금은 규모가 엄청난 종합 동영상 서비스고, 중국만의 문화를 몇 년째 쌓아 왔다.
그래도 탄막, MAD, 소재를 잘라서 갖고 노는 문화의 DNA가 비슷한 건 맞다.
야수선배한테는 이보다 좋은 토양이 없다.
2. 야수선배는 ‘공감돼서’ 인기인 게 아니다. 소재로서 너무 쓸 만하다
여기서부터는 치이카와와 절대 섞으면 안 된다.
야수선배를 보고
“이 사람도 사는 게 힘들구나. 나도 힘내야지.”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이스티 장면을 보고 “뭔가 좀 힘들어 보이네” 하는 정도다.
인기의 이유는 인물에 대한 감정이입이 아니라 밈 소재로 이상할 만큼 쓰기 편하다는 것이다.
얼굴이 있다.
목소리가 있다.
짧은 대사가 있다.
이상하게 머리에 남는 장면이 있다.
뭐든 억지로 갖다 붙이는 ‘○○설’ 놀이가 있다.
그리고 최강은 114514라는 숫자 하나만으로 밈이 성립한다는 점이다.
숫자는 번역할 필요가 없다.
중국어로도 114514.
한국어로도 114514.
일본어로도 114514.
원작을 안 봤어도, 내용을 몰라도, 숫자만 올리면 아는 사람끼리 통하는 신호가 된다.
2026년 3월에도 Bilibili에서 야수선배와 114514를 정리한 영상이 약 39만 회 재생됐다. 중국에서 그냥 옛날 얘기가 된 게 아니라는 뜻이다.[3]
야수선배의 해외 진출 성적, 아마 본인이 제일 모를 것이다.
3. 중국에서 야수선배가 살아남은 건 ‘번역할 필요가 거의 없어서’
보통 해외 콘텐츠는 국경을 넘으려면 설명이 필요하다.
누구냐.
무슨 작품이냐.
무슨 관계냐.
이 대사가 왜 웃기냐.
대부분의 밈은 여기서 죽는다.
설명하는 순간 재미가 사라지니까.
그런데 야수선배는 상당 부분을 설명 없이 옮길 수 있다.
얼굴.
음성.
반복.
○○설.
뜻을 알 수 없는 편집.
“원작 이야기를 이해하고 나서 웃으세요” 같은 조건이 거의 없다.
오히려 원래 맥락에서 멀어질수록 더 이상한 방향으로 불어난다.
중국 귀축 문화는 바로 이렇게 ‘소재를 다른 물건으로 바꿔 놀기’와 궁합이 좋다.
그래서 중국으로 건너간 건 한 사람이라기보다 밈 소재 꾸러미에 가깝다.
4. 치이카와는 반대다. ‘의미’가 통해서 강하다
치이카와는 야수선배와 정반대다.
이쪽은 원작의 의미가 그대로 남은 채 국경을 넘는다.
생김새는 귀엽다.
그런데 세계는 꽤 팍팍하다.
일을 한다.
시험을 본다.
자격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달라진다.
위험한 토벌로 보수를 받는다.
노력한다고 꼭 성공하는 건 아니다.
무서워서 운다.
그래도 밥은 맛있다.
친구가 있다.
작지만 기쁜 일이 있다.
중국에서는 치이카와를 ‘전자 이부프로펜’(중국어로 电子布洛芬)처럼 부르는 사례가 보도됐다. 현실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지친 마음을 조금 가볍게 해 주는 존재라는 뜻이다.[4]
여기서 중요한 건 “중국·한국 젊은이들이 힘들어서 어두운 만화가 먹힌다”로 끝내지 않는 것이다.
치이카와는 어둡기만 한 작품이 아니다.
부조리한 일이 있는데도, 일상의 작은 행복이 제대로 남아 있다.
그게 먹힌다.
완전히 절망적인 작품은 지쳤을 때 너무 무겁다.
완전히 말랑말랑한 작품은 어른이 자기를 겹쳐 볼 구석이 적다.
귀여운 얼굴로 ‘일’, ‘시험’, ‘무서워’, ‘그래도 밥은 맛있어’를 보여 주니까 딱 좋다.
5. 중국의 치이카와는 이미 ‘온라인 인기’ 단계가 아니다
중국에서 치이카와의 인기는 밈을 넘어 오프라인 매장과 대형 행사로 번졌다.
2024년 상하이 팝업스토어는 3일 동안 약 800만 위안어치를 팔았다고 보도됐다.[5]
2026년에도 상하이에서 대규모 치이카와 전시가 열렸다. 높이 9미터짜리 대형 풍선이 놓였고, 상하이의 골목 문화와 현지 음식을 엮은 한정 연출도 선보였다.[6]
이건 꽤 중요하다.
일본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게 아니다.
중국의 거리, 음식, 사진 문화, 쇼핑 경험 속에 치이카와를 다시 집어넣고 있다.
‘수입 캐릭터’에서 ‘현지에서 같이 노는 캐릭터’로 바뀌는 중이다.
6. 한국에서는 치이카와가 대중화. 야수선배는 마니아 인터넷 문화 쪽
한국에서는 이 차이가 더 뚜렷하다.
치이카와는 한국에서 ‘먼작귀’라고도 불린다. ‘뭔가 작고 귀여운 녀석’을 줄인 말이다.
2024년 12월 서울 팝업에는 10일 동안 약 3만 명이 다녀갔고, 2026년에는 상설 매장이 운영되고 있다. 2026년 9월에는 한국의 쇼핑·패션 플랫폼에서 ‘치이카와’ 검색량이 작년 같은 기간보다 522%, ‘먼작귀’는 282% 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7]
2026년 9월 30일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는 개봉 첫날 12만 2293명이 보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고, 다음 날까지 누적 관객은 약 19만 9천 명이었다.[8]
이쯤 되면 ‘일부 애니 팬만 아는’ 수준이 아니다.
반면 야수선배는 한국에서도 ‘야수선배’, ‘114514’ 등으로 알려져 있고, 2025년에도 니코니코 계열 갤러리에 새 ○○설 글이 올라왔다.[9]
다만 확인되는 활동의 중심은 꽤 마니아적인 인터넷 커뮤니티다.
한국의 야수선배를 한국의 치이카와와 같은 대중적 인기라고 하면 과장이다.
이 둘은 나눠서 보는 편이 더 재밌다.
7. 그래도 둘에겐 공통점이 있다. ‘사진 한 장 + 한마디’로 돌아간다
정반대처럼 보이는 두 개가 인터넷에서 강한 이유는 비슷하다.
긴 설명이 필요 없다.
한 장으로 돈다.
몇 초면 돈다.
한마디로 돈다.
야수선배라면 얼굴 + 114514.
치이카와라면 우는 얼굴, 우사기의 기행, 하치와레의 한마디.
본편을 다 안 봐도 이모티콘, 짧은 영상, 캡처, 이미지, 팬아트로 입문할 수 있다.
그래서 SNS나 영상 사이트와 궁합이 좋다.
게다가 둘 다 보는 사람이 이어서 만들 수 있다.
야수선배는 의미를 부수면서 이어 간다.
치이카와는 “이거 완전 나잖아” 하며 의미를 보태면서 이어 간다.
한쪽은 맥락을 버릴수록 강해지고, 한쪽은 맥락을 내 일상으로 가져올수록 강해진다.
여기가 제일 재밌는 부분이다.
8. “동아시아는 힘들어서 유행했다”로 끝내면 너무 대충이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일, 취업, 시험, 경쟁의 고단함이 젊은 층 기사에 자주 나온다. 치이카와 인기를 다룬 기사에서도 이런 생활감과의 겹침을 설명한다.[4][7]
하지만 그것만으로 인기를 설명하면 위험하다.
캐릭터가 퍼지려면
현지어 이름이 자리 잡고,
볼 수 있는 곳이 있고,
공식 서비스가 있고,
굿즈를 살 수 있고,
팝업에 갈 수 있고,
이미지나 짧은 영상으로 만들기 쉽고,
친구와 공유하기 쉽다는
유통의 힘도 필요하다.
야수선배도 마찬가지다. “젊은이들이 지쳐서 114514가 유행했다”가 아니다.
니코니코와 가까운 편집 문화가 먼저 있었고, Bilibili의 귀축·MAD라는 그릇이 있었고, 거기에 번역이 필요 없고 잘라 쓰기 쉬운 소재가 들어왔다.
힘들다는 것만으로는 유행하지 않는다. 유행할 만한 모양이어야 한다.
결론: 치이카와는 ‘의미가 통해서’, 야수선배는 ‘의미가 없어도 통해서’ 강하다
정리하면 두 해외 인기는 비슷해 보여도 전혀 다르다.
치이카와는
“노력해도 다 잘되진 않는다. 그래도 작은 행복은 있다.”
라는 뜻이 국경을 넘는다.
야수선배는
“설명은 됐고 114514.”
로 국경을 넘는다.
치이카와는 마음에 파스를 붙여 준다.
야수선배는 머리에 갑자기 114514를 던진다.
치료법이 너무 다르다.
그래도 둘 다 짧고, 따라 하기 쉽고, 공유하기 쉽고, 원작 밖에서도 산다.
그래서 강하다.
같은 일본발이어도 하나는 공감돼서 수출됐고, 다른 하나는 공감하지 않아도 놀 수 있어서 수출됐다.
이렇게 정반대인데 같은 스마트폰 화면에서 나란히 뜬다.
인터넷이 원래 그런 곳이다.
- Bilibili, 초기 Niconico 음MAD가 Bilibili 귀축 문화로 들어온 흐름 bilibili.com
- Bilibili, 귀축 문화와 Niconico·AcFun 영향, 2015년 귀축 구역 bilibili.com
- Bilibili, 2026-03-22, 야수선배·114514 회고 영상 bilibili.com
- 澎湃新闻/光明日报, 치이카와와 ‘电子布洛芬’ thepaper.cn
- 澎湃新闻, 상하이 치이카와 팝업 매출과 세계관 분석 thepaper.cn
- 상하이시 정부, 2026-09-21, CHIIKAWA DAYS 상하이 특별전 japanese.shanghai.gov.cn
- 매일경제, 2026-09-27, 한국 치이카와 상설 매장·검색량·팝업 방문객 mk.co.kr
- 한국경제, 2026-10-02, 극장판 치이카와 개봉 첫날 관객 수와 인기 배경 hankyung.com
- DC Inside 니코니코 동화 마이너 갤러리, 2025-07-07, 한국어 ‘야수선배 ○○설’ 사례 gall.dcinsid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