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저녁을 먹고 돌아온 날, 분명 즐거웠는데도 녹초가 된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는 “아까 그렇게 말하면 안 됐나?” 하며 대화를 되짚고, 집에 와서는 벌써 다음에 만나자는 말에 어떻게 답할지 고민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친구가 적어야 더 행복한 걸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런데 줄이고 싶은 것은 친구의 수일까, 아니면 계속 긴장하고 신경 쓰는 시간일까. 둘을 나눠 생각하면 관계를 모두 끊는 것 말고도 다른 길이 보인다. 만나는 시간을 줄이고, 답장이 늦을 수 있다고 말하고, 깊은 고민을 나눌 상대를 고를 수 있다. 우선 바꿔 볼 수 있는 것은 관계를 이어 가는 방식이다.
즐겁게 보내고 난 피로와 집에 와서도 남는 마음의 피로
좋아하는 사람과 하루 종일 밖에서 시간을 보내면 몸은 피곤해진다. 여럿이 함께하는 대화가 부담스럽다면 좋은 모임에 다녀온 뒤에도 조용히 쉬고 싶을 수 있다. 한 번 피곤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과의 관계를 판단할 필요는 없다.
살펴볼 것은 어디에 힘을 썼는지다.
- 이야기가 끊이지 않을 만큼 즐거웠나, 아니면 침묵이 두려워 계속 말을 했나
- 상대를 배려했나, 아니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내 의견을 감췄나
- 이번에는 내가 고민을 들어 줄 차례였나, 아니면 매번 나만 듣는 역할인가
- 만나자는 제안을 거절했을 때 “다음에 보자”로 끝났나, 아니면 긴 설명을 요구받았나
여기서 말하는 ‘관계의 비용’은 상대의 가치에 가격을 매기자는 뜻이 아니다. 일정 조율, 답장을 서둘러야 한다는 압박, 억지로 밝게 행동하는 수고처럼 내가 감당하고 있는 부담을 알아보기 위한 말이다.
친구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면 한동안 내가 더 많이 도울 수도 있다. 매번 똑같이 돌려받을 필요는 없다. 그래도 내 사정과 한계를 말할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있어야 한다.
거리를 두기 전에, 약속 하나의 부담부터 줄여 보자
예를 들어 매주 오래 이어지는 식사 모임이 버겁다면 “이번 달은 여유가 없어서, 다음 달에 가볍게 차만 마실까?”라고 제안해 보자. 늦은 밤 고민 상담이 계속된다면 “오늘은 좀 쉴게. 내일은 잠깐 들어 줄 수 있어”라고 끝낼 시점을 정해도 된다.
“너를 만나면 피곤해”라고 상대 자체를 평가하기보다는 “두 시간쯤 있다가 집에 가고 싶어”, “답장이 주말까지 늦어질 때도 있어”처럼 내가 무리 없이 지킬 수 있는 조건을 전하는 편이 대화하기 쉽다.
상대가 의외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스스로 맡고 있던 ‘바로 답장하는 친구’, ‘만나자는 말을 거절하지 않는 친구’ 역할을 내려놓는 것만으로도 함께하는 즐거움이 돌아올지 모른다.
반대로 한계를 말할 때마다 비난하거나, 비밀을 들먹이며 자기 뜻대로 따르게 하려 하거나, 거절해도 계속 밀어붙인다면 연락 빈도와 만나는 장소를 포함해 거리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같은 대화를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것만이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방법은 아니다.
절친은 연락 횟수보다 다시 편하게 만날 수 있는지로 생각해 보자
반년 만에 만나도 자연스럽게 근황부터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매일 연락하면서도 답장이 조금만 늦어지면 긴장하게 되는 상대도 있다.
절친에 대한 공통된 정의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약한 모습을 드러내도 괜찮고, 나도 상대의 이야기가 듣고 싶고, 의견이 달라도 관계가 이어지며, 바쁜 시기가 지나면 편하게 다시 만날 수 있는 친구를 떠올려 보자.
‘언제든 한없이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를 친밀함의 조건으로 삼으면 서로 힘들어진다. “오늘은 어려워”라고 말할 수 있고, 다른 날에는 도와줄 수 있는 관계. 도움을 청하는 것과 거절하는 것이 모두 가능해야 오래 이어 가기 쉽다.
만날 때마다 인생 고민을 나눌 필요도 없다. 함께 먹은 밥 이야기만 하다가 돌아오는 날이 있다고 해서 신뢰가 옅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볍게 아는 사람들까지 줄일 필요는 없다
소수의 가까운 친구가 중요하다고 해서 인사만 나누는 지인들까지 멀리할 필요는 없다. 직장에서 날씨 이야기를 하는 사람, 산책하다가 눈인사를 나누는 사람, 취미 모임에서 가끔 대화하는 사람. 서로의 깊은 사정을 몰라도 얼굴을 보면 반가운 관계가 있다.
Sandstrom과 Dunn의 2014년 연구에서는 학생들이 같은 수업을 듣는 사람들을 평소보다 더 많이 만나 교류한 날에 행복감과 소속감을 더 높게 보고했다. 지인과 나누는 짧은 대화에도 주목할 만한 근거다. 다만 이 결과가 모든 사람에게 교류를 늘리라고 권하거나, 가장 적절한 친구 수를 정해 주는 것은 아니다. 연구 초록
가벼운 관계의 장점 중 하나는 매번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어제 경기나 새로 생긴 가게에 대해 한마디 나눈다. 거기서 대화를 마쳐도 괜찮은 관계를 굳이 절친 사이로 발전시킬 필요는 없다.
직장 친구와는 친밀함과 업무의 공정함을 함께 지키자
“이 작업은 어디를 보면 알 수 있어?”라고 편하게 물을 사람이 있으면 업무를 혼자 끌어안는 순간이 줄어든다. 상황을 이미 아는 상대와 짧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직장 내 관계가 주는 특별한 도움이다.
Gallup은 직장에 절친이 있는 직원이 업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몰입’ 상태에 있을 가능성이 약 7배 높다고 보고했다. 이런 관련성이 친구 한 명을 만들면 업무 몰입도가 7배가 된다는 인과관계를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Gallup의 설명
가까운 동료가 있다면 업무상 결정과 필요한 정보는 다른 관련자들도 볼 수 있는 곳에 공유하자. 인사나 고객 관련 비밀을 잡담거리로 삼지 않고,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라면 사적인 친밀함이 평가나 업무 배분에 영향을 주지 않게 해야 한다. 이런 선을 지키는 것이 우정과 주변의 신뢰를 함께 보호한다.
또한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연애 관계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성별과 관계없이 편안하게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소중히 여길 수 있다. 불평만이 대화의 중심이 됐다면 점심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거나, 대화 시간을 정하거나, 도움을 줄 수 있는 담당자나 창구에 문제를 가져가는 등 이야기하는 방식도 바꿀 수 있다.
“친구가 없다”는 말에서 무엇이 부족한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쉬는 날 만날 친구가 없는 것과 어려울 때 연락할 사람이 없는 것은 다르다. ‘절친’이라고 부를 사람은 없어도 가족, 동료, 취미로 만난 지인과의 교류에 만족하는 사람도 있다.
친구 수를 세기 전에 다음 질문을 해 보자.
- 소소한 근황을 나누고 싶을 때 연락할 사람이 있는가
- 문제가 생겼을 때 의논할 사람이나 도움받을 창구를 알고 있는가
-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고 있는가, 아니면 사실은 이야기하고 싶지만 포기한 것인가
부족한 것이 가벼운 대화라면 처음부터 절친 찾기에 나설 필요는 없다.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할 기회를 하나 만들고, 인사나 짧은 대화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의지할 곳이 한 사람에게 몰려 있다면 다른 지인이나 상담 창구도 알아 두는 것이 좋다. 그래야 그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
AI에 생각을 적어 보면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정리하는 방법도 있다. 다만 다른 사람의 비밀이나 직장의 기밀을 입력하지 않고, AI의 답변으로 상대의 속마음을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사람에게 직접 도움을 청하거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까지 하나의 도구에 모두 맡길 필요는 없다.
다음 약속에서 딱 하나만 바꿔 보자
인간관계를 돌아보고 싶다면 사람 수를 줄이기 전에 다음 약속 하나를 조정해 보자. “이번에는 한 시간만 있을게.” “이번 주는 쉬고 다음 달에 만나고 싶어.” 그런 조건에서도 기분 좋게 만날 수 있다면, 남기고 싶었던 것은 그 사람이고 줄이고 싶었던 것은 무리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 함께 식사를 즐기는 친구, 얼굴을 보면 인사하는 지인. 각각 다른 좋은 점이 있다. 모든 관계에 똑같은 깊이를 요구하기보다 함께하는 즐거움과 내가 쉴 수 있는 여유를 모두 남겨 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