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몇 달 사이 일상이 꽤 많이 글이 됐다. 어디 갔다 왔다, 뭘 먹었다, 뭘 샀다, 실수했다, 웃었다, "이게 뭐지?" 싶었다. 이 정도 사소한 일까지 글감이 된다. 이제는 블로그 소재를 찾는다기보다, 생활 속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글이 아이템처럼 떨어지는 게임을 하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평범한 일기는 아니다. 일어난 일을 적고 끝내지 않는다. AI에게 던져 보고, 인터넷 자료나 연구와 맞춰 보고, 반대되는 가설도 찾아보고, 생각을 정리한 다음 마지막에 글로 남긴다. 그러니까 일기 + 라이프로그 + 에세이 + 방학 자유 연구 + 외부 메모리가 한 덩어리가 된 셈이다. 학교라면 선생님이 "숙제 종류를 하나만 골라 주세요" 하고 난감해할 것이다.
1. 5초 결론: 책 대신 내 인생으로 매일 독후감을 쓰고 있다
가장 가까운 비유는 "매일 쓰는 독후감"이다. 다만 읽는 책이 내 생활이다.
일어난 일은 본문, 감정은 포스트잇, AI와 나눈 대화는 초고, 검색과 논문은 참고 문헌, 글은 완성본이다. 게다가 아무도 읽지 않아도 나한테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뿐 아니라 그때의 내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까지 남는다.
일기가 "오늘은 이랬다"로 끝난다면, 이 방식은 "오늘은 이랬다. 왜 그랬을까? 정말 그럴까? 다른 설명은? 찾아봤다. 이렇게 다시 생각했다"로 끝난다. 일기장에 심사위원이 같이 살기 시작한 것이다.
2. 이것도 라이프로그일까? 거의 맞다. 다만 글로 많이 손본다
연구에서 말하는 라이프로그는 사진, 소리, 위치, 활동량처럼 일상에서 나오는 데이터를 계속 기록해 두고, 나중에 내가 겪은 일과 행동을 찾아보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분야를 뜻한다.[1] 일기, 사진, 달력처럼 기억을 도와주는 도구는 예전부터 있었고, 디지털 라이프로그는 그것을 훨씬 촘촘하게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2]
내 방식도 "생활을 나중에 검색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꽤 라이프로그다. 하지만 자동으로 사진을 찍는 카메라처럼 원본 데이터만 쌓아 두지는 않는다.
겪은 일 → 느낌 → 의문 → 조사 → 다시 해석 → 글감 → 글
여기까지 가공한다. 그래서 정확히는 연구가 붙은 라이프로그, 또는 내 인생 해설 중계판에 가깝다. 기록 파일이 혼자 칼럼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3. 왜 "정리하는 동안 생각이 정리될까"
머릿속 생각은 한꺼번에 여러 개가 떠오른다. 그런데 글로 쓰려면 순서를 정해야 한다. "원인", "감상", "사실"을 한 상자에 넣어 둔 채로는 문장이 안 된다.
표현적 글쓰기(expressive writing) 연구에서는 경험을 말로 풀어 의미 있는 이야기로 다시 짜는 것, 나를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 원인과 깨달음을 나타내는 말이 늘어나는 것 등을 살펴본다.[3][4] 메타 분석에서는 우울, 불안, 스트레스에 대한 평균 효과가 작지만 의미 있다는 보고가 있다. 다만 대상과 조건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5]
그러니까 "쓰면 다 낫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래도 글로 쓰면 생각의 조각들을 책상 위에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느낌에는 연구에서 비슷한 개념으로 다룬 내용이 있다.
머릿속에서는 "뭔가 싫었다"가 한 줄로 끝난다. 글에서는 "뭐가? 언제? 사실이야, 추측이야? 다른 설명은 없어?" 하고 편집부가 시끄럽게 묻는다. 그 편집부가 바로 나다.
4. AI와 주고받는 대화가 크다: 일기가 혼잣말이 아니라 대화가 된다
종이 일기는 써 놔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AI는 대답한다.
"이게 이런 뜻이야?" 하고 물으면, 다르게 말해 주고, 종류별로 나눠 주고, 반대 사례와 검색어, 관련 연구까지 알려 줄 수 있다. 그러면 머릿속에 열어 둔 채 처리 못 한 창을 바깥으로 꺼낼 수 있다.
이건 인지적 외부화(cognitive offloading), 즉 바깥의 도구를 써서 머릿속 기억 부담을 줄이는 생각과 많이 닮았다. 2025년 리뷰에서는 장보기 목록처럼 정보를 바깥에 두면 기억 과제 성적에 도움이 되지만, 외부화에는 대가도 있을 수 있다고 정리했다.[6]
AI를 비유하자면 외부 RAM(바깥에 둔 작업 기억)이다. 다만 이 RAM은 가끔 자신 있게 존재하지 않는 파일을 내놓는다. 평범한 메모장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5. "연구와 맞춰 보기"를 하면 나를 응원하는 모임으로 끝나기 어렵다
AI와 대화할 때 중요한 건 AI가 "맞아요!" 하고 말해 주면 끝내지 않는 것이다.
내 가설을 내놓는다. 원자료나 연구를 찾는다. 반대쪽 데이터도 본다. 현실의 사람에게 물어볼 수 있는 건 물어본다. 틀렸으면 고친다.
이렇게 하면 AI는 "정답을 내려주는 선생님"이 아니라 검색 담당, 반박 담당, 편집 담당이 된다. 내 생각을 정당화하려고 응원단으로 쓰면, 벽치기가 아니라 벽이 전부 박수만 치는 꼴이 된다.
범용 생성형 AI에 대해 미국심리학회(APA)도, 마음 건강을 위해 쓰는 사람이 많지만 심리 치료를 대신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한다. 그리고 무조건 맞장구치는 것, 잘못된 정보, 불완전한 평가, 개인정보 문제를 위험으로 꼽았다.[7] 그러니 "AI에게 물어봤다"는 결론이 아니라 조사 시작 버튼 정도로 쓰는 게 딱 좋다.
6. "인지 상담도 겸한다"는 느낌은 어디까지 맞을까?
느낌으로는 이해가 된다. 일어난 일을 말로 옮긴다. 생각과 사실을 나눈다. 다른 관점을 낸다. 과거와 비교해 본다. 다음에 할 행동을 정한다. 분명 상담에서 하는 작업 일부와 겉모습이 비슷하다.
하지만 이름은 나눠 두는 쪽이 안전하다. 범용 AI에는 임상 전문가의 자격도 없고, 말투나 표정 같은 말 이외의 정보까지 포함한 전체 상황 파악도 못 하고, 위기 상황에 일관되게 대응할 능력도 없다.[7]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이것을 스스로 돌아보기 지원 + 생각의 외부화 + 현실 확인 보조라고 부른다. "인지 상담"은 편리한 비유일 뿐, 의료 행위의 간판이 아니다.
한마디로 AI는 흰 가운을 입지 않았다. 검색창이 안경을 썼을 뿐이다.
7. 성찰과 반추는 비슷해 보여도 가는 곳이 다르다
"나에 대해 몇 번이고 생각한다"만 보면 성찰과 반추는 비슷하다. 하지만 반추(rumination) 연구에는 두 가지를 나누는 모델이 있다. 하나는 불만과 괴로움을 수동적으로 계속 되씹는 경향(brooding), 다른 하나는 문제를 이해하려고 일부러 생각하는 경향(reflective pondering)이다.[8]
물론 실제 생각은 둘 중 하나로 딱 나뉘지 않는다. 그래도 실생활에서는 다음 구분이 쓸모 있다.
- 반추에 가까운 것: "왜 이렇게 됐지?"를 같은 재료만으로 백 번 돌린다.
- 성찰에 가까운 것: "뭘 모르지?"를 짚어 내고 새로운 정보를 가지러 간다.
- 고칠 수 있는 성찰: 가설을 세우고, 바깥의 반응을 받고, 필요하면 결론을 바꾼다.
글로 쓰는 것의 장점은 마지막에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고 임시 저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게임을 끝낼 수 있다. 머릿속 회의가 영원한 정기 회의가 되지 않는다.
8. 매일 쓰는 독후감의 정체: 감상이 아니라 "나라는 모델의 변경 기록"
몇 달 치 글이 쌓이면 가치는 글 하나하나에만 있지 않다.
"예전에는 뭘 신경 썼는지", "같은 상황에서 반응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판단 기준이 언제 바뀌었는지"가 보인다. 이건 그냥 추억 앨범이라기보다 나라는 모델의 버전 기록에 가깝다.
프로그래머가 변경을 관리하는 Git으로 말하면, 인생 전체는 너무 커서 커밋할 수 없지만 "오늘 알게 된 것"은 커밋할 수 있다.
fix: 다른 사람의 반응을 머릿속에서 멋대로 확정하지 않기
feat: 모르는 건 본인에게 물어보기
docs: 호텔 엘리베이터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다
내 인생의 변경 기록이 묘하게 구체적이 된다.
9. 그리고 샤워딩: 입력을 끊으면 뒤에서 조용히 정리가 시작된다
AI와 대화하고, 검색하고, 글을 쓴 다음 샤워를 하러 간다. 스마트폰은 만지지 않는다. 새로운 정보도 넣지 않는다. 그러면 아까까지의 재료가 저절로 이어질 때가 있다.
여기서 생긴 엉성한 신조어가 "욕조 로딩"이고, 우리 집 사정에 맞춘 정식 변형이 샤워딩(Showerding)이다. 욕조가 없어도 되는 가벼운 버전이다.
"샤워하다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이야기에는 창의적 인큐베이션(creative incubation)과 마인드 원더링(mind wandering, 생각이 자유롭게 떠도는 것)에 관한 연구가 있다. 어빙(Irving) 연구팀은 적당히 주의를 끄는 활동을 하는 동안 생각이 자유롭게 떠도는 것이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이어질 수 있다고 보였다.[9] 다만 이 실험은 참가자를 실제로 샤워실에 넣은 것이 아니라 영상 과제를 썼다. 제목에 "샤워 효과(shower effect)"가 들어 있다고 연구실이 목욕탕이 된 건 아니다.
그러니 샤워딩은 과학 용어가 아니다. 그래도 집중해서 넣고 → 잠깐 떨어져서 → 이어지기를 기다린다는 발상에는 분명히 가까운 연구가 있다.
10. 이 방식의 강점: 한 번의 경험에서 세 번 얻는다
이렇게 하면 한 번의 일에서 적어도 세 가지가 남는다.
- 경험치: 실제로 뭔가를 했다.
- 이해: AI, 조사, 성찰로 의미를 파고들었다.
- 자산: 글이나 검색할 수 있는 기록으로 남았다.
그래서 글이 안 읽혀도 제로는 아니다. 공개한 글로는 약해도 내 개인 데이터베이스로 일한다. 반대로 나를 위한 메모에서 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글이 나오기도 한다.
평범한 일기가 "기록"이라면, 이건 기록에 연구 부서와 편집부를 증축한 일기다. 재산세가 걱정될 만한 규모다.
11. 단점도 있다: 너무 많이 기록하면 "AI가 편집한 나"가 된다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다.
첫째, 개인정보. 생활을 자세히 기록할수록, 하나씩은 익명이어도 합쳐 보면 본인이 드러날 가능성이 커진다. 공개하는 글에서는 구체적인 사람 이름, 장소, 직장, 의료 정보, 상대가 특정되는 이야기를 일반적인 표현으로 바꿔야 한다.
둘째, AI의 오류. 그럴듯한 설명이 맞다는 보장은 없다. 연구와 맞춰 보기, 원자료, 반증이 필요하다.
셋째, 지나친 외부화. 전부 AI에게 맡기면 스스로 기억하고 생각할 기회가 줄 수 있다. 인지적 외부화 리뷰가 "이익만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보는 것이 이 부분이다.[6]
넷째, 이야기로 만들어 버리는 함정. 글은 읽기 쉽게 하려고 원인과 결과를 나란히 놓는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모르겠다", "여러 원인이 얽힌 것 같다"를 남겨 두는 것도 글의 품질이다.
기록은 지도이지 인생 그 자체가 아니다. 지도가 너무 깔끔하면 현장을 다시 보러 가자.
12. 결론: 블로그를 썼더니 내 인생에 검색, 검토, 변경 기록이 붙었다
최종적인 흐름은 이렇다.
겪는다 → AI와 이야기한다 → 의문을 말로 옮긴다 → 인터넷, 연구, 현실과 맞춰 본다 → 반대 근거를 본다 → 임시 결론을 낸다 → 글로 쓴다 → 샤워딩 → 다음 가설이 돋아난다
이건 순수한 일기도, 연구도, 상담도 아니다. 각각의 일부를 도구로 빌려 온 AI 시대의 연구가 붙은 라이프로그라고 부르는 게 가장 가깝다.
그리고 가장 웃긴 건, 글을 쓰려고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평소처럼 살다가 "왜 그럴까?" 싶어서 AI에게 던지면, 몇십 분 뒤에는 제목이 생겨 있다.
생활 이벤트 발생.
경험치를 얻었다.
가설을 얻었다.
글을 얻었다.
드롭률을 100%에 가깝게 만들 필요는 없다. 쉬는 날은 그냥 쉬자.

